고종석>국어의 풍경들[6] 오른손은 '올바른' 손

아이들이 앞, 뒤, 위, 아래와 함께 일찌감치 배우는 방향어가 오른쪽, 왼쪽이다. 사전에서는 오른쪽을 “동쪽을 향했을 때, 남쪽에 해당하는 방향”이라고 정의하고, 왼쪽은 “동쪽을 향했을 때, 북쪽에 해당하는 방향”이라고 정의한다. 동서남북의 방향은 해가 돋는 쪽을 기준으로 해서 정해지므로 고정돼 있지만, 오른쪽, 왼쪽은 삼라만상이 다 기준이 될 수 있어서 유동적이다. 관형사 `오른'은 접두사처럼 쓰여 오른편, 오른손, 오른팔, 오른발, 오른다리, 오른새끼(오른쪽으로 꼰 새끼), 오른나사(시계 바늘 방향으로 돌리는 나사) 따위의 복합어를 만들고, 관형사 `왼' 역시 접두사처럼 쓰여 왼편, 왼손, 왼팔, 왼발, 왼다리, 왼새끼(왼쪽으로 꼰 새끼), 왼나사(시계 바늘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나사) 따위의 복합어를 만든다.

`오른손'은 어원적으로 `옳은 손'이라는 뜻이고, `왼손'은 어원적으로 `그른 손'이라는 뜻이다. 관형사 `오른'은 `옳다' 는 뜻의 옛말 `올하(*아래아*)다' 의 관형형 `올한(*아래아*)'이 변한 것이고, `왼'은 `그르다'는 뜻의 옛말 `외다'의 관형형 `왼'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언어학자 최세진은 한자교습서 <훈몽자회>(1527년)에서 한자 是와 非를 `올할(*아래아*) 시' `욀 비'로 읽었고, 이 책이 나온 지 반세기쯤 지난 뒤 유명한 서예가 한석봉이 임금의 명령을 받아 엮은 한자교습서 <석봉 천자문>(1583년)에서는 한자 右와 左를 `올할(*아래아*) 우' `욀 좌'로 읽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어에서는 오른쪽, 왼쪽이 옳고 그름과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석봉 천자문>의 해당 부분을 현대어로 고치면 右는 `옳을 우'이고 左는 `그릇될 좌'다. `바르다'의 관형형에서 온 관형사 `바른'이 `오른'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데서도 이런 사정이 드러난다. `바른손' `바른쪽' `바른편'은 `오른손' `오른쪽' `오른편'의 동의어다. 오른손은 옳은 손이자, 곧고 올바른 손인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왼손잡이로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데는, 오른쪽이 바른쪽이자 옳은 쪽이라는 생각도 한 몫을 하고 있는 듯하다.

신기한 것은, 오른쪽과 왼쪽을 옳고 그름에 대응시키는 관념이 한국어에서만이 아니라 외국어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실상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들 대부분에는 이 언어 사용자들이 오른쪽을 `좋은 쪽'으로, 왼쪽을 `나쁜 쪽'으로 생각했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예컨대 프랑스어로는 오른쪽을 droit라고 하고 왼쪽을 gauche라고 하는데, droit의 일차적인 뜻은 `곧은, 바른, 옳은'이고, gauche는 `왼쪽'이라는 의미 외에 `서투른, 비뚤어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어에서는 오른쪽을 뜻하는 destro가 `능숙하다'는 뜻을 겸하고 있는 반면에, 왼쪽을 뜻하는 sinistro는 `불길하다'는 뜻을 겸하고 있다. 이탈리아어에서 오른쪽, 왼쪽이 지니고 있는 이 `능란함, 상서로움'과 `불길함'이라는 비유적 의미는 이 단어들을 낳은 고대 로마시기의 라틴어 dexter와 sinister가 이미 담고 있었던 의미다. 영어에서도 오른쪽을 뜻하는 right는 본디 `곧은, 올바른'의 뜻이고, 왼쪽을 뜻하는 left는 고대 영어에서 `약한'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는 `좌익(左翼)' `우익(右翼)'은 한국어나 유럽어의 왼쪽, 오른쪽이 지니고 있는 이런 어원적(또는 비유적) 의미와는 무관하다. 다시 말해, 옳아서 우익이 된 것도 아니고, 글러서 좌익이 된 것도 아니다.

`좌익(左翼)'은 일차적으로 `왼쪽 날개'라는 뜻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급진적―혁신적 정파를 뜻한다. `오른쪽 날개'라는 뜻의 우익(右翼) 역시 정치적으로는 점진적―보수적 정파를 뜻한다. 이렇게 정치적 맥락에서 쓰이는 한국어 `좌익' `우익'은 같은 뜻의 영어 left wing, right wing을 번역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left wing, right wing을 일본 사람들이 먼저 `사요쿠(左翼)' `우요쿠(右翼)'라고 번역했고, 그 말들이 한자를 매개로 해 `좌익' `우익'의 형태로 한국어에 차용된 것이다.

영어에서 right wing, left wing이 정치적 우파와 좌파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프랑스어의 관행을 수입한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왼쪽'이 `진보주의자'를 의미하고 `오른쪽'이 `보수주의자'를 의미하게 된 것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다. 혁명기에 국민의회가 열렸을 때, 의장석에서 바라보아 오른쪽에 왕당파 의원들이 앉았고, 왼쪽에 혁명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앉았던 데서 이런 용법이 생긴 것이다.

좌익-좌파, 우익-우파
정치적 맥락에서 쓰이는 한국어 `좌익' `우익'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어의 관행이 영어와 일본어를 거쳐 수입된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왼쪽'(gauche)이 급진적―혁신적 정파를 의미하고 `오른쪽'(droite)이 점진적―보수적 정파를 의미하게 된 것은 1789년의 대혁명 이후다. 물론 프랑스 혁명기의 좌익, 우익과 지금의 좌익, 우익은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그 당시의 좌익 정파가 내세웠던 자유, 인권, 법적·정치적 평등 같은 가치들은 오늘날 우익 정파들도 대개 옹호하고 있다. 당시의 우익 정파가 지닌 세계관을 오늘날에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극우라고 부른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진행된 역사가 좌익와 우익 사이의 경계를 왼쪽으로 많이 이동시킨 것이다. 그 점에서 1789년 혁명은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용어로서의 좌익은 좌파라고도 하고, 우익은 우파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말들의 쓰임새를 잘 들여다 보면 한국어에서 `좌익'과 `좌파', `우익'과 `우파'는 그 가치가 다르다. 첫 번째 차이는 `좌익'·`우익'이라는 말이 한 사회의 정치 지형 전체를 놓고 급진적―혁신적 정파나 점진적―보수적 정파를 가리키는 데 견주어, `좌파'·`우파'는 어떤 정파나 단체 내부에서 급진적―혁신적이거나 점진적―보수적인 갈래를 가리킬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 좌익 정당이 없으므로 프랑스의 정당을 예로 들어보자. 물론 예로 들 정당들이 프랑스의 정당일 뿐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한국어 `좌익'/`우익'과 `좌파'/`우파'에 대해서다. 조스팽 총리가 소속된 사회당이나 그 우당인 공산당·녹색당 등은 좌익 정당이고, 시라크 대통령이 소속된 공화국 연합이나 그 우당인 프랑스 민주동맹은 우익 정당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 민주동맹은 여러 개의 우익 정당들이 느슨하게 결합한 우익 정당 연합체다. 한편, 사회당 내에서 예컨대 앙리 에마뉘엘리로 대표되는 급진적 갈래는 사회당 `좌파'이고, 미셸 로카르로 대표되는 점진적 갈래는 사회당 `우파'다. 이러한 구별이 늘상 또렷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당이나 공산당, 녹색당을 좌파 정당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공화국 연합이나 프랑스 민주동맹을 우파 정당이라고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회당의 급진적 갈래를 사회당 `좌익'이라고 한다거나, 사회당의 점진적 갈래를 사회당 `우익'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좌익'과 `좌파', `우익'과 `우파'의 두 번째 차이는―이 차이가 훨씬 더 섬세하고 흥미로운데―, `좌익'·`우익'이 `좌파'·`우파'와 개념적 동의어로 쓰였을 경우, `좌파'·`우파'가 중립적 어휘이거나 가르랑말인 데 견주어, `좌익'·우익'은 으르렁말이라는 점이다. 우리말의 `좌익'·`우익'과 `좌파'·`우파' 가 환기하는 이미지, 즉 함축적 의미는 서로 다르다. `좌익'이라는 말에는 대체로 해방기의 남로당이나 그 이후 북한의 조선 로동당 노선이 보여주는 극히 과격한 스탈린주의의 이미지가 배어 있다. 그리고 `우익'이라는 말에도 서북청년단이나 박정희나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광신적 반공주의의 이미지가 배어 있다. 한편 `좌파'라는 말에는 뭔가 온건하고 합리적이고 지적인 이미지가 있다. `우파'라는 말에도 그렇다.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는 말이 통할 것 같은데 `좌익'과 `우익' 사이에선 통화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좌익 인사들은 대체로 자신을 `좌익'이라고 부르지 않고 `좌파'라고 부른다. 반면에 그 `좌파'는 자신과 이념적 대칭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우파'라고 부르지 않고 `우익'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익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을 `우익'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우파'라고 부르기를 더 즐기며, 자신의 이념적 적대자들을 `좌파'라고 부르기보다는 `좌익'이라고 부르기를 더 즐긴다. `좌익'이나 `우익'이 으르렁말이 된 것은 해방기나 6.25를 전후하여 우리 사회에 이념 대결이 최고로 긴장돼 있었을 때 이 말들이 사용됐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좌익'의 동의어로서 `좌파'와 `우익'의 동의어로서 `우파'는 그런 그르렁말의 연상을 완화하기 위해 그 이후에 채용된 말들일 것이다. `좌익'과 `좌파', `우익'과 `우파' 사이에 개념적 의미의 차이는 없다. 그러나 그 말들이 연상시키는 것, 즉 그 말들의 함축적 의미는 다르다. 그 함축적 의미의 미세한 차이에 편승하고 반응하며, 우리들은 말들의 전쟁을 벌인다. 정치적 언설이나 광고 카피를 포함한 말들의 전쟁은 결국 이런 연상공학에 의해 수행된다.


매파&비둘기파

매파는 대외 강경론자 또는 주전파를 뜻하며 1798년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 처음으로 사용한 말인데, 베트남전쟁이 교착화하면서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베트남전쟁의 확대·강화를 주장한 미국내 보수강경파를 지칭한 말. 자기의 이념,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상대방과 타협하지 않고 강경히 사태에 대처하려는 사람, 특히 외교정책 등에서 무력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와 반대로 전쟁을 더이상 확대시키지 않고 한정된 범위 안에서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주화파를 비둘기파라고 한다.

 

by 우량아 | 2008/11/17 10:38 | 트랙백 | 덧글(0)

오늘속으로) 12월 18일 스미소니언 협정

*고종석의 2003년 글. 브레튼우즈, 스미소니언, 킹스턴에 대한 간략한 설명.

1971년 12월18일 미국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서 선진 10개국 재무장관이 모여 새로운 국제통화조정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의 중요 내용은금에 대한 달러의 평가를 순금 1온스 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7.895% 절하하고, 환율 변동의 폭을 상하 각 2.25%로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스미스소니언 협정으로 출발한 국제통화질서를 그 이전의 브레튼우즈 체제에 견주어 스미스소니언 체제라고 부른다.

스미스소니언 체제는 고정환율제도를 근간으로 한 브레튼우즈 체제와 변동환율제도를 근간으로 한 킹스턴 체제 사이의 과도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인 연합국 대표들은 ‘미국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고 다른 나라 통화는 달러에 연동시키자’고 합의한 바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출발이었다. 이 체제 아래서 국제통화기금(IMF)은 가맹국의 평가 설정을 의무화하고, 이 평가가 ‘금 또는 미국 달러와의 교환 비율’이라는 공통의 척도로 표시돼 달러는 국제 금융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이런 금환 본위제 또는 달러 본위제 아래서 환율은 거의완전히 고정적이었다.

그러나 미국 경제가 흔들리던 1971년 상반기에 달러가 시장으로 쏟아져 나오자, 닉슨 정부는 그 해 8월15일 ‘달러를 더 이상 금으로 바꿔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전세계가 경악했다. 달러의 금태환이 정지됐다는 것은4반세기 동안 세계 경제를 지탱해온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졌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닉슨 쇼크다. 그리고 이 쇼크가 그 해 12월 선진국 재무장관들을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모이게 했다. 스미스소니언 협정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고정환율제도는 1976년 1월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개최된 IMF 잠정위원회가 각국에 환율제도의 선택재량권을 부여함으로써 완전히 무너졌다.(한국일보 고종석)

by 우량아 | 2008/10/16 17:30 | 트랙백 | 덧글(0)

헌법 제 20조를 위하여

지난번 이 자리에 쓴 '미친 사랑의 기도'는 근본적 시장주의가 초등학교 과정에서부터 계급에 따라 교육을 분리하는 세태를 비판한 글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글에서 이 천박한 시장지상주의를 이명박 정권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적지 않은 독자들이 그 글을 기독교 비판으로, 더 나아가 이 정권의 종교 편향에 대한 비판으로 읽은 듯하다. 칼럼에 대한 비판적 반응들은 대개 헐거운 호교론(護敎論)을 밑절미 삼아 이 정권을 두둔하고 있었다.

글 첫머리에서 무신론자를 자처한 것이 그런 오해를 낳은 것 같다. 그런데 어차피 이런 오해를 받고 보니, 달갑잖은 계몽주의자 시늉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했던 그 역할 말이다. 나는 사실, <만들어진 신>을 읽고 나서 저자에게 약간 짜증이 났다.

고작 신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중언부언을 마다 않고 그렇게 두꺼운 책을 썼다는 데 비위가 상했다. 도킨스의 능력으로라면 그 10분의 1 분량의 텍스트로라도 무신론을 깔끔하게 옹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 <만들어진 신>의 부피가 계몽을 향한 열정보다는 인세 수입에 대한 타산과 더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까지 잠깐 했다.

무신론자가 되기 위해, 굳이 <만들어진 신>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 책보다 (내용이 아니라 두께가) 훨씬 얄팍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정도면 충분하다. 철학자 브라이언 매기는 <칼 포퍼>라는 책에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포퍼의 마르크스 비판을 읽고 나서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를 흉내내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러셀의 기독교 비판을 읽고 나서도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겠다.

러셀의 책 제13장은 '하느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러셀과 어느 성공회 신부가 BBC 방송에서 한 토론을 옮겨 놓고 있다. 코플스턴이라는 성(姓)을 지닌 이 신부는 대담에서, '종교 없이도 윤리가 가능한가?', 다시 말해 '하느님이 없어도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지침 없이 되풀이하며 러셀을 괴롭힌다.

이 주제는 도킨스의 책에서도 두 장을 차지하고 있는데, 물론 나는 러셀이나 도킨스처럼 그게 가능하다고 여긴다. 나는 신에 기대서가 아니라 내 이성과 경험에 기대어 선악을 구별할 수 있다. 물론 그 능력은 내가 속한 인류의 진화 단계에 얽매여 있을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가 저지른 죄악들이나 한국 개신교의 '돈 숭배'를 손가락질하며,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지식인들'도 있다. 이들은 '타락한 교회'를 비판하며, 가난하고 핍박 받는 이들의 벗이었던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라고 훈계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부정직하다 여긴다. 20세기에 출간된 가장 강력한 기독교 변증서일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조차 이런 '세련된' 지식인들을 거세게 비판했다.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그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은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만일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고 인간이었다면, 그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약에 묘사된 역사적 예수는 교만하고 우스꽝스러운 미치광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어야만, 그의 기괴한 행적들을 납득할 수 있다. 나는 예수를 약간 별났던 사내로 여기고, 무염수태도 부활도 믿지 않으므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인들을 업신여기거나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 조국' 대한민국을 자기들의 신에게 봉헌하려고 헌법 제20조를 짓밟지만 않는다면. 이 정권이 들어선 뒤, 이 조항을 잊은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 걱정이다.(한국일보 고종석)

by 우량아 | 2008/10/16 12:58 | 트랙백 | 덧글(0)

돌아온호구

환상의 호구 리만 브라덜스

by 우량아 | 2008/10/07 11:20 | 트랙백 | 덧글(0)

장경동 목사님, 질문이요(진중권)

"우리 아버지가 있죠. 그죠.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죠. 그죠. 이렇게 해서 계속 올라가면 어디까지 갈까. 예? 아담. 그 아담 위에는 누구여. 하나님. 이거는요, 인간이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니더라고요. 가다 스님한테 물어보세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러지. (교인들 웃음) 우리도 몰라야지. 근데 우리가 어떻게 알아. 하나님이 가르쳐 주니까. 그러니까 기독교가 참 좋은 종교요. 아우, 그 우월성이 그냥 드러나 버리잖아.”


 장경동 목사님, 질문이요. 성경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아들만 둘 낳았지요. 그런데 아벨 때려죽이고 세상에 홀로 남은 카인이 무슨 재주로 애를 낳았나요? 황우석의 줄기세포 1번처럼 단성생식을 했나 봐요. 그것도 ‘처녀생식’이 아니라 ‘총각생식’을 했나 봐요. 모르시면,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니까.” 그래서 “기독교가 참 좋은 종교” 아니겠어요?


“여러분 이 세상을 보면요, 인종이 3인종이 있어요. 왜 인종이 3인종이야. 그거 모른다니까. 세상 사람은 알 수가 없어.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 인해 인종이 퍼졌기 때문에 셈의 인종이 황인종, 함의 인종이 흑인이고, 야벳의 인종이 백인이고, 그래서 3인종이 퍼진 거여. 근데 어떻게 알아. 하나님이 가르쳐주니까 알지. 그러니까 이런 걸 모르는 종교는 다 가짜여. 아멘?”


목사님, 또 질문이요. 셈은 황인종, 함은 흑인종, 야벳은 백인종이라면, 걔들의 아버지였던 노아는 무슨 인종인가요? 흑백황인종요? 그렇다면 노아는 피부에 하양, 노랑, 까망 점이 박힌 점박이였겠네요. 노아가 무슨 바둑이 종잡니까, 달마시언 종잡니까? 모르면, 하나님한테 물어 보세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니까.” 그래서 ”기독교가 참 좋은 종교” 아니겠어요?


“내가 좀 비범하다고 해서 경동교를 만들면 돼? 안 돼? 응? 내가 지금 경동교를 만들면 안 되듯, 2500년 전에 석가모니 선생도 불교를 만들면 안 되는 것이었어. 원불교를 만들면 안 되고, 통일교를 만들면 안 되고, 그래서 아브라함은 훌륭해도 아브라함교를 안 만들잖아, 모세는 훌륭해도 모세교를 안 만들어, 엘리야가 훌륭해도 엘리야교를 안 만들어. 왜. 인간은 교를 만들면 안 돼.”


목사님, 질문이요. 근데 예수는 왜 교를 만들었대요? 아,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구요? 에이, 무슨 말씀을.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人子)이라 불렀지요. 아, 부활해서 신이 되셨다구요? 그렇다면 석가모니도 인간으로 태어나 신이 된 거 아닙니까? 그런 시나리오라면, 석가모니 쪽이 예수보다 저작권이 한 500년 쯤 앞섭니다.


“앉아서 108 번뇌를 없앴어. 없앴는데 이제 어떻게 먹고 사는 거야. 겨우 얻어먹고 사는 거야. 시주 자루 들고. 그러니까 불교는 아무리 훌륭해야 얻어먹고 살아. 그러나 성경은 간단해.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그러니까 벌써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가르침으로 나가는 기독교는요 가는 데마다 잘 되는 거여. 그러니까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 살아.”


아무리 훌륭해야 얻어먹고 사는 건 기독교도 마찬가지죠. 성경 보면 예수님도 특정한 직업 없이 이 집, 저 집, 얻어먹고 다니시더라구요. 그 뿐인가요? 멀쩡히 연안수산업에 종사하던 건실한 베드로, 가정 박차게 했지요. 그래서 어디 이스라엘 경제가 살겠습니까? 그래도 부처님은 밥을 굶으셨어요. 그게 ‘쿨’하다고 생각했던지,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간 표절 다이어트 하셨지요?


“하나님 믿는 나라 동그라미 치면서 못사는 나라 있음 한 나라만 이야기 해봐요. 내가 현찰로 10만원 줄 테니까." 다른 목사가 옆에서 거든다. 돈 좀 벌어볼까 했더니, 누가 선수를 쳤다. 어느 블로거에 따르면 전 세계에 예수 믿으면서 못 사는 나라가 자그마치 44개국. 하나님도 안 가르쳐주신 이 '지식'은 국정원 홈피에서 얻은 거란다. 현찰로 440만원의 꿈에 부푼 블로거는 교회로 연락을 했으나, 전화를 안 받는다나? 잠실 할렐루야 교회 신일수 목사님, 전화 좀 받으세요.(씨네 21 진중권) 

by 우량아 | 2008/10/03 19:05 | 트랙백 | 덧글(0)

미친 사랑의 기도/ 고종석

괜한 겸손을 떨진 않겠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불행스런 일 앞에서 그 무신론이 기우뚱거린 적도 있긴 했다. 그럴 때면, 어쩌면 신이 있을지도 몰라, 하며 불가지론자 시늉을 하거나, 이놈의 신은 딴 데 정신 팔려 제가 만든 세상엔 무심하군, 하며 이신론자 시늉을 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고 지선(至善)한 신의 존재를 믿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불가지론자 시늉이나 이신론자 시늉도, 가늠할 길 없는 세상사에 절망해 잠시 비틀거린 것일 뿐, 그 유혹이 내 무신론에 금을 내진 못했다. 눈앞의 일상적 비참을 보면서도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신을 믿는 사람들의 그 맹목이 나는 부럽다.

'부럽다'는 말은 비아냥거림이 아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에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 비록 생각할 줄은 안다 해도 '갈대'에 불과한 인간이, 제 운명의 상승을 어떤 초자연적 존재에게 빈다고 해서 그걸 탓할 수는 없다. 영국인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원제의 뜻은 <신[神]이라는 망상>)이라는 책에서 펼친 주장을 나는 거의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도킨스가 그 책에서 성직자나 신자들에게 보인 경멸과 조롱에까지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 무신론이 도킨스의 무신론보다 여려서가 아니라, 동류에 대한 내 연민이 계몽을 향한 도킨스의 열정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도킨스보다 더 거만하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경건해진다. 도킨스라면 그들 앞에서, 그들의 '무지(無知)'와 '미몽(迷夢)'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차리라. 그러나 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겼을 간절함과 순박함에 가슴이 저리다. 그들을 슬기로운 사람이라 여기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사람이라 여긴다. 그 기도가 평화나 박애 같은 공적 가치를 위한 것일 땐 특히 그렇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모두가 내 눈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대입 수능이 한 달 여 앞으로 다가왔으니, 자식이 시험을 잘 치르게 해주십사고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진을 어느 신문이든 한두 번은 곧 1면에 실을 게다. 나는 제 자식의 '시험 운'을 위해 곡진하게 기도하는 이 '헌신적' 어머니들의 사진이 역겹다. 그들 가운데 자식이 애쓴 만큼만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어머니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자식에게 '덤의 운'이 따르기를 기원할 것이다.

그들의 기도가 추한 것은, 기도라는 그 정결한 옷 안에 탐욕이라는 때투성이 몸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제 자식을 축복하는 기도를 통해 이웃들의 자식에게 저주를 내리기 때문이다. 나 자신 그런 역겨운 기도의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이런 기도가 역겹다고 털어놓을 자격을 내게서 빼앗는 것은 아니리라. 어쩌면 그 기도는 지독한 사랑의 기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때의 사랑은 미친 사랑일 것이다. 그 사랑은 제 자식의 동년배들을 향한 미움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최근 교육 당국은 '국제중학교'라나 뭐라나를 통해서, 이 미친 사랑의 기도를, 저주의 기도를 초등학생 부모들에게까지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24시간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는 '하나님 나라'가 될 모양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돈 많은 자들의 기도에만 귀를 기울이시는 이상한 취향을 지니셨다.

그리하여 한국에선, 경제학자 우석훈이 근저 <괴물의 탄생>에서 지적하듯, 주거공간의 분리, 시장의 분리와 더불어 교육의 분리가 빠르게 진행될 참이다. 국가와 사회가 시장에 고스란히 포섭된 상태를 뜻하는 '괴물'이 우석훈의 우려대로 파시즘행 통로를 낼지 어쩔지는 모르겠다.

슬프게도 이 괴물이 태어난 것은, 우석훈에 따르면, '삼성을 위한 정권'이었던 노무현 '좌파' 정권 때 일이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갈 길은 아득하다.(한국일보 고종석)

by 우량아 | 2008/10/02 10:50 | 트랙백 | 덧글(0)

강의석 짱



한다면 한다는 대인배, 강의석 짱

by 우량아 | 2008/10/01 17:58 | 트랙백 | 덧글(2)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